서양 선교사가 바라본 3․1운동과 일제의 수촌리 만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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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6년 캐나다 장로교회 선교사로 내한한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박사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 교수로 근무하였다. 그는 1919년 3․1운동 당시 사진을 찍어서 한국인들의 독립운동 사실을 세계에 알렸고, 제암리․수촌리․화수리 등에서 발생했던 일제의 만행들에 대한 보고서를 남겼다.
○ 스코필드 박사는 1919년 8월 2일 ‘더 재팬 어드버타이저(The Japan Advertiser)’지에 “한국인 정신의 발견(Discovery of the Korean Mind)”이라는 글을 기고했는데, 그는 위와 같이 3․1운동으로 표출된 한국인들의 용기를 예찬했다.
○ 1919년 4월 3일 경기도 수원군 장안면 면사무소에서는 300여 명의 면민들이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 시위대는 장안면장에게 태극기를 들게 해서 앞세우고 우정면 면사무소를 향해갔다. 시위대는 화수경찰관주재소로도 갔는데, 이때는 시위인원이 2,500명으로 늘어났다.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순사는 권총을 발사하여 시위 중인 한국인 3명을 쓰러뜨리고 도주하다 인근 야산에서 붙잡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스코필드는 순사의 사망에 대해 아래와 같이 밝혔다.
○ 제암리에서 5km 떨어진 수촌리(현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에서 일어난 만행은 4월 3일의 만세시위와 순사 사망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일어났다. 4월 5일 새벽 일본군은 주모자 색출을 명분으로 수촌리를 급습하여 마을 일대를 방화하고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1919년 4월 25일 “수촌리 잔학행위 보고서(Report of The SU-CHON Atorocities)”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스코필드는 수촌리 만행은 일본 순사 살해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이 아니었으며, 마을을 불태워 초토화시키는 행위가 한국인들의 반일감정 고조를 불러일으킨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그는 일제의 정의롭지 못한 만행으로 인해 한국인은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조국의 자유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처럼 스코필드 박사는 일제의 수촌리 만행의 부당함을 역설했고, 이에 대한 한국인들의 분노와 독립에의 의지에 깊이 공감했다.
○ 국사편찬위원회는 스코필드 박사 자료를 포함한 재한선교사 자료는 물론, 3․1운동과 관련된 경성지방법원 문서, 판결문, 소요사건 관계 서류, 일본외무성기록, 신문기록 등 3․1운동 사료를 총망라하여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https://hgis.history.go.kr/samil)로 제공하고 있다.
○ 국사편찬위원회 허동현 위원장은 “일제 식민지배의 폭압에 맞서 전 민족 성원들이 독립을 외친 3․1운동은 대한민국 헌법정신의 기초가 되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당시 제3자였던 서양 선교사들은 3․1운동에서 표출된 한국인들의 용기와 독립정신을 예찬했고, 일제의 만행에 함께 분노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을 추모하고, 독립정신을 계승할 수 있도록 앞으로 더욱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밝혔다.
문의: 국사편찬위원회 기획협력실 편사연구사 이현욱 (02-500-82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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