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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서양 선교사가 바라본 3․1운동과 일제의 수촌리 만행
서양 선교사가 바라본 3․1운동과 일제의 수촌리 만행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5-02-28
조회
521

 

서양 선교사가 바라본 31운동과 일제의 수촌리 만행

1916년 캐나다장로교회 선교사로 내한한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박사는 31운동 당시의 사진을 찍어서 세계에 알렸고, 경기도 수원군(현 화성시) 수촌리 등지에서의 일제 만행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스코필드는 31운동을 통해 한국인들의 강렬한 독립의지를 발견했고, 일제의 수촌리 만행에 대한 한국인들의 분노에 깊이 공감했다.

 
 

○ 1916년 캐나다 장로교회 선교사로 내한한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박사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 교수로 근무하였다. 그는 191931운동 당시 사진을 찍어서 한국인들의 독립운동 사실을 세계에 알렸고, 제암리수촌리화수리 등에서 발생했던 일제의 만행들에 대한 보고서를 남겼다.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있기 하루 이틀 전날 밤에, 한 한국인이 나를 찾아와 품 안에 깊숙이 숨겨두었던 그 유명한 독립선언서를 꺼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나는 무척이나 놀랐다. 내가 한국인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나는 그들이 (일본)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자주 들어 알고 있었고, 언젠가 때가 무르익으면 자신들이 굴레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할 거라고 하는 말도 익히 들었다. 나는 그것이 헛된 꿈이라 생각했고, 한국인들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정신적인 용기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 프랭크 스코필드(1919)

 

스코필드 박사는 191982더 재팬 어드버타이저(The Japan Advertiser)’지에 한국인 정신의 발견(Discovery of the Korean Mind)”이라는 글을 기고했는데, 그는 위와 같이 31운동으로 표출된 한국인들의 용기를 예찬했다.

 

○ 191943일 경기도 수원군 장안면 면사무소에서는 300여 명의 면민들이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 시위대는 장안면장에게 태극기를 들게 해서 앞세우고 우정면 면사무소를 향해갔다. 시위대는 화수경찰관주재소로도 갔는데, 이때는 시위인원이 2,500명으로 늘어났다.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순사는 권총을 발사하여 시위 중인 한국인 3명을 쓰러뜨리고 도주하다 인근 야산에서 붙잡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스코필드는 순사의 사망에 대해 아래와 같이 밝혔다.

  

이야기는 주위의 모든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던 44[화수리 시위는 43일이다] 장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이미 다른 곳에서 한 두 번 정도는 이런 시위에 이미 참여 한 적이 있었으나, 모든 것이 평화롭게 진행되었었기 때문에 경찰서 앞에서도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놀랍고 분하게도 일본인 경찰국장은 총을 쏘게 하여 사람을 죽이고 또 부상케 한 것이다.그것은 과잉 반응이었다. 일경은 그 잔혹한 행동을 서슴지 않고 행했던 것이다. 이 같은 사태로 치닫자, 그들은 순사를 공격하게 되었고, 화가 나서 때려죽이며 경찰서를 방화하게 되는 상황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폭력 자체는 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으나, 화가 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난 것이었다.
- 프랭크 스코필드(1919)
 

 

○ 제암리에서 5km 떨어진 수촌리(현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에서 일어난 만행은 43일의 만세시위와 순사 사망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일어났다. 45일 새벽 일본군은 주모자 색출을 명분으로 수촌리를 급습하여 마을 일대를 방화하고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1919425수촌리 잔학행위 보고서(Report of The SU-CHON Atorocities)”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이 사람들이 얼마나 끔찍한 범죄를 저질러서 그렇게 잔인한 대우를 받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만세"라고 불렀던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인 모두가 그렇게 했다. 경관이 살해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마을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이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며, 그 지역 마을은 그 죄로 인해 불태워졌다. 나는 마을을 쓸데없이 불태우고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게 만든 진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일본은 그런 행위로 한국인들의 마음을 일본에 대해 강경하게 만들고 있다. 일본의 이러한 행위로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반감은 강경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더라도 일본인들이 자신들을 죽이려 한다고 느끼기 시작했고, 죽어야 한다면 조국의 자유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낫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 정의를 실현할 수 없는데,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려고 애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프랭크 스코필드(1919)

 

○ 스코필드는 수촌리 만행은 일본 순사 살해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이 아니었으며, 마을을 불태워 초토화시키는 행위가 한국인들의 반일감정 고조를 불러일으킨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그는 일제의 정의롭지 못한 만행으로 인해 한국인은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조국의 자유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처럼 스코필드 박사는 일제의 수촌리 만행의 부당함을 역설했고, 이에 대한 한국인들의 분노와 독립에의 의지에 깊이 공감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스코필드 박사 자료를 포함한 재한선교사 자료는 물론, 31운동과 관련된 경성지방법원 문서, 판결문, 소요사건 관계 서류, 일본외무성기록, 신문기록 등 31운동 사료를 총망라하여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https://hgis.history.go.kr/samil)로 제공하고 있다.

 

○ 국사편찬위원회 허동현 위원장은 일제 식민지배의 폭압에 맞서 전 민족 성원들이 독립을 외친 31운동은 대한민국 헌법정신의 기초가 되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당시 제3자였던 서양 선교사들은 31운동에서 표출된 한국인들의 용기와 독립정신을 예찬했고, 일제의 만행에 함께 분노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을 추모하고, 독립정신을 계승할 수 있도록 앞으로 더욱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밝혔다.

 

 

문의: 국사편찬위원회 기획협력실 편사연구사 이현욱 (02-500-8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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