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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삼국사기』를 새롭게 선보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삼국사기』를 새롭게 선보이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5-04-15
조회
268

 

국사편찬위원회, 삼국사기를 새롭게 선보이다.

한국 고대사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열쇠, 삼국사기

국사편찬위원회가 6년에 걸쳐 새롭게 번역하고 주석을 더하다.

 
□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고려 인종 23년(1145), 김부식(金富軾) 등이 편찬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서이자, 한국 고대사 연구에 필수적인 사료(史料)이다. 『삼국사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 “의자왕의 아들이 나ㆍ당 연합군이 되어 백제 부흥군과 싸운 까닭은?” 
  660년 나·당 연합군의 침공으로 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의자왕(義慈王)과 그의 아들 부여융(扶餘隆)은 당나라로 압송되었다. 늙은 왕은 망국의 한을 품고 머나먼 이국에서 생을 마감했고,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며 조용히 세월을 보냈다.

원   문 : 立王子隆爲太子, 大赦.
번역문 : 왕자 융(隆)*을 태자로 삼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6, 의자왕 4년(644)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링크를 참조.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28r_0020_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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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 의자왕의 아들이다. 중국 뤄양[洛陽]에서 발견된 「부여융 묘지명(扶餘隆 墓誌銘)」에 따르면 615년에 태어나 682년에 사망하였으며, 이름과 자(字)가 모두 융(隆)이었다. 의자왕 4년(644)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의자왕 20년(660)에 백제가 멸망한 후 당에 포로로 잡혀갔다. 그 후 당(唐)나라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에 의해 웅진도독으로 임명되어 백제 땅으로 돌아와 백제의 유민들을 회유하고 신라 문무왕과 취리산에서 맹약(盟約)을 맺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당전쟁에서 패배한 당나라가 웅진도독부를 요동지역으로 옮김에 따라 부여융도 웅진도독 대방왕에 임명되어 요동지역에서 백제유민들을 통솔하다가 다시 당나라 장안(長安)으로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죽었다. 당나라 고종(高宗) 영순(永淳) 원년(682)에 세워진 그의 묘비는 현재 중국 허난성[河南省] 정저우시[鄭州市] 허난박물원[河南博物院] 1층 석각예술관(石刻藝術館)에 전시되고 있다. (이하 생략)



◦ 3년 후 부여융은 당나라 장수 손인사(孫仁師) 등과 함께 나·당 연합군의 일원으로 백강 전투에 참전하여 백제 부흥군과 왜(일본)의 지원군에 맞섰다. 이 전투에서의 참패로 백제 부흥 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백제의 태자였던 부여융의 ‘뜻밖의 귀향’은 백제 부흥 운동 진압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원  문 : 至龍朔三年, 揔管孫仁師, 領兵來救府城, 新羅兵馬, 亦發同征, 行至周留城下. 此時, 倭國舩兵, 來助百濟, 倭舩千艘, 停在白沙, 百濟精騎岸上守舩. 新羅驍騎, 爲漢前鋒, 先破岸陣, 周留失膽, 遂即降下. 南方已定, 迴軍北伐, 任存一城, 執迷下降. 兩軍併力, 共打一城, 固守拒捍, 不能打得. 新羅即欲迴還, 杜大夫云, ‘凖勑, 旣平已後, 共相盟㑹, 任存一城, 雖未降下, 即可共相盟誓.’新羅以爲凖勑, 旣平已後, 共相盟㑹, 任存未降, 不可以爲旣平, 又且百濟姦詐百端, 反覆不恒, 今雖共相盟㑹, 於後恐有噬臍之患, 奏請停盟.”
번역문 : “용삭(龍朔) 3년(663)에 이르러서 총관(摠管) 손인사(孫仁師)가 군사를 이끌고 부성을 구원하러 왔는데, 신라의 병마도 또한 나아가 함께 정벌하여 가서 주류성 아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왜(倭)의 수군이 백제를 도우러 와서 왜의 배 1,000척이 백강(白江)에 정박해 있고 백제의 정예기병이 언덕 위에서 배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신라의 용맹한 기병이 중국 군사의 선봉이 되어 먼저 언덕의 군영을 깨뜨리자 주류성에서는 간담이 서늘해져 마침내 곧바로 항복하였습니다.*(이하 생략)”
-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7, 문무왕 11년(671)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링크를 참조.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07r_0020_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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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 백제부흥군을 공격하는 나당연합군의 주력은 육군이었다. 육군은 문무왕과 당장(唐將) 손인사(孫仁師)·유인원(劉仁遠) 등이, 수군은 유인궤(劉仁軌)·두상(杜爽)·부여융(夫餘隆) 등이 이끌었다.



◦ 다시 시간을 되돌려 3년 전, 당시 신라 태자였던 김법민(金法敏, 후에 문무왕(文武王))은 항복해 온 부여융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모욕했다. 과거 김법민의 누이는 의자왕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원한은 돌고 돌아 이제 부여융은 당나라의 협력을 얻어서라도 신라 문무왕으로부터 고국의 옛 땅을 보전하고자 했다. 

원  문 : 十三日, 義慈率左右夜遁走, 保熊津城, 義慈子隆與大佐平千福等出降. 法敏跪隆於馬前, 唾面罵曰, “向者, 汝父枉殺我妹, 埋之獄中. 使我二十年間, 痛心疾首, 今日汝命在吾手中.” 隆伏地無言.
번역문 : 〔7년(660) 7월〕 13일에 의자왕(義慈王)이 좌우의 측근을 거느리고 밤을 틈타 도망쳐 달아나 웅진성(熊津城)에 몸을 보전하고,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扶餘隆)이 대좌평(大佐平) 천복(千福) 등과 함께 나와서 항복하였다. 법민(法敏)이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어 말하기를,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억울하게 죽여서 옥중(獄中)에 묻은 적이 있다.* 〔그 일은〕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하였는데, 오늘 너의 목숨은 내 손안에 있구나!”라고 하였다. 융은 땅에 엎드려서 말이 없었다.
-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7년(660)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링크를 참조.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05r_0040_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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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 선덕왕(善德王) 11년(642)에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함락하고 항복한 성주(城主) 김품석(金品釋)과 그의 부인 고타소랑(古陀炤娘) 즉 김법민(金法敏)의 누이를 죽인 것을 말한다.


◦  이처럼 『삼국사기』는 삼국 시대의 정치·외교·전쟁 뿐만 아니라 인물들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하지만 원문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 일반 독자가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으며, 기존 번역본도 연구 성과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 이에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허동현)는 『삼국사기』를 새롭게 번역하고 정밀한 주석을 더한 역주(譯註)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6년(2019~2024)에 걸쳐 『삼국사기』 전 50권을 완역(完譯)하고, 그 결과물을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였다.

 ◦ 국사편찬위원회는 이미 2009년 국내 최초로 『삼국사기』 정덕본(正德本)을 정본(定本)으로 삼아 번역과 주석을 진행하였고, 국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그 결과물을 웹 서비스로 제공하였다. 

 ◦ 그러나 2009년 포항 중성리 신라비가 새로 발견되었고, 경주나 부여와 같은 고도(古都)를 중심으로 새로운 목간(木簡)이 계속 출토되고 있다. 이렇듯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함께 한국 고대사의 연구 성과가 축적되면서 기존의 견해가 수정되는 사례가 증가하였다.  

 ◦ 그리하여 국사편찬위원회는 2019년부터 『삼국사기』 재역주 사업을 추진하였다. 여기에는 한국 고대사 연구를 선도하는 20명의 연구자가 참여하여 학계의 최신 연구 성과를 충실하게 반영한 새로운 역주본을 완성하였다.

 ◦ 새로운 역주본은 일반 이용자도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가급적 한자 노출 빈도를 줄이고 현대어로 평이하게 작성하였다. 또한 17,400여 건에 달하는 주석은 학계의 중요 연구나 최신 연구 및 발굴 성과를 충실히 반영하여 완성도를 높였다. 아울러 이용자가 연구에 참조할 수 있도록 참고문헌 목록을 제시하고, 원문 이미지 또한 정덕본(국보), 옥산서원본(국보), 성암본(보물) 등 여러 판본을 웹 상에서 대조할 수 있도록 하였다. 

□ 허동현 위원장은 “『삼국사기』는 한국 고대사의 핵심 사료로, 이를 보다 명확하게 해석하는 작업이 연구의 출발점”이라며, “이번 재역주 사업이 학계 뿐만 아니라 역사 교육에도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 이 결과물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 고대 사료 DB’ (https://db.history.go.kr/ancient/main.do)에서 이용할 수 있다.

□ 한편 국사편찬위원회는 2025년부터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재역주를 추진할 계획이다.
 ◦ 『삼국사기』 재역주의 후속 사업으로 추진되는 『삼국유사』 재역주 사업 역시 최신의 연구 성과를 충실히 반영함으로써 한국 고대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데에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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